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진주만 공습 (문단 편집) === 최선의 전략과 오판 === 기습을 통해 태평양의 미군을 빈사 상태로 만들어버린 뒤, 일본군의 동남아시아 방향으로의 남하를 미국이 용인하게 하는 유리한 조건 하에 강화를 맺겠다는 전략이 당시 일본이 내세울 수 있는 최선이었음에도 결과적으로 오판이었던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는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의 미국의 정치적 단결력을 간과했다는 것이다. 진주만 공격으로 태평양의 미군 함대는 [[과달카날 전역]] 초반까지 계속 수세에서 작전을 했어야 할 정도로 약화되었던 것도 사실이나, 일본군 대본영은 미 해군을 진주만에서 전멸 혹은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히고 이후 증원되는 미국 함대 역시 [[점감요격작전]]에 따라 차례차례 요격하여 미 해군에게 큰 성과 없이 지속적인 피해를 입게 한다면, 경제적 문제 및 정치적 문제로 인해 미국이 태평양에서 철수하고 일본의 동남아시아 침략을 용인할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그러나 제대로 된 선전포고도 하지 않고 [[기습]]을 했던 일본의 행동은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과 해군의 [[어니스트 킹]]이 중심이 되어서 주장하던, 이전까지 미국 내에서 소수파의 주장이었던 [[제2차 세계 대전]] 참전이라는 엔진에 강력한 추진력을 넣어준 셈이 되어 버렸으며,'''[* 농담이 아니라 일본 제국의 이 짓으로 인해 당대 미국 내에서, 고립주의자들이 중심이 되어서 주장하던 '무의미한 전쟁'이라는 논리의 반전 여론은 사실상 사라져 버렸다. 아래를 보면 알겠지만, [[고립주의]]를 지지하던 공화당조차 [[프랭클린 D. 루스벨트|민주당 소속이던 대통령]]에게 [[일본 제국]], 그리고 [[추축국]] 전체를 상대로 확대된 전쟁의 수행에 대한 아낌없는 지원을 약속하면서 사실상 충성 맹세를 한 수준이었다. 어떤 고립주의 파벌의 공화당 의원도 기자들에게 "이제부터 우리가 할 일은 저 일본 놈들을 철저히 두들겨 패는 것."이라고까지 말했다고 한다.] 당시 미국에서는 [[일본]]에 대한 인종차별적 사상도 만연해 있었던지라 진주만 공습은 전미적으로 큰 공분을 샀고 미국의 반전주의자들조차 소수의 극단적인 반전주의자[* [[제1차 세계 대전]] 때부터 전쟁참가 반대론자였던 자넷 P. 렌킨은 이쪽이었다.]들을 제외하고 일본에 대한 전쟁에는 찬성하게 되는 결과를 불러일으켜 전 국민이 일치단결해 총력전 태세에 나선 미국과의 전면전을 강요당하는 역효과만 내고 일본이 당초 원했던 미국과의 강화는 아예 불가능해졌다. 둘째는 미 해군의 태평양에서의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시키는 데 실패했다는 것이다. 초반에 일본군은 진주만 공습으로 미군의 전함전력을 크게 약화시켰으며 이후 이어진 [[자바 해전]]에서 [[랭글리(항공모함)|USS 랭글리(CV-1)]]을 대파시켜 미군이 자침시키도록 하고 [[산호해 해전]]에서는 [[렉싱턴급 항공모함]] USS 렉싱턴(CV-2)를 격침시키는 등 일본 해군은 미 해군을 상대로 승승장구하였으나, 여전히 태평양 함대의 최후의 주요 전력인 [[요크타운급 항공모함]] 3척이 끝까지 일본 해군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따라서 이를 전멸시켜 미국의 태평양 전역에서 확고한 우위를 점하기 위해 진주만 공습의 주역들인 카가, 아카기, 소류, 히류와 [[공고급 순양전함]] 2척까지 끌고와 [[미드웨이 해전]]을 벌였으나, 결과적으로 미 해군은 위 3척 중 1척을 잃으면서도 위 진주만의 주역들을 모조리 수장시켜버렸다. 거기다가 그 살아남은 2척 중 1척인 [[CV-6 엔터프라이즈|USS 엔터프라이즈(CV-6)]]는 미 해군이 항모를 지속적으로 1척씩 상실하는 동안에도 [[과달카날 해전]]까지 끈질기게 버티면서 일본 해군의 발목을 잡아 미 해군이 제해권을 유지할 수 있게 해주었다. 결국 일본 해군은 [[과달카날 해전]]까지 미 해군에 비해 우위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미 해군의 기동방어를 파쇄하지 못하여 끝내 태평양 전역에서 미 해군의 제해권을 상실시키지 못했고, 이후 미국의 물량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하자 그야말로 [[필리핀 해 해전|일방적으로 학살당하며]] 와해되었다. 셋째로 일본의 생각과는 달리 미국은 태평양의 지배권을 일본과 나눌 생각이 전혀 없었다는 점이다. [[더글러스 맥아더]]의 경우처럼 미국은 [[필리핀]]에 대한 영향력을 놓을 생각이 전혀 없었으며, 주요 동맹이었던 [[영국]]과 [[프랑스]] 등의 식민지를 일본군이 침략하는 것을 방관하는 것 역시 당시 유럽전선에서 협력하고 있던 미국의 입장에서는 정치적으로 논외인 부분이었다. 이외에 결정적이라 볼 수는 없으나 진주만 공습 시 전술적 오판 중 하나로 언급된 항공모함과 유류창고 등 기반시설을 파괴하지 못했다는 점,[* 유류창고는 시야 방해를 이유로 파괴하지 않는 뻘짓이 있었다고 지적하지만 유류탱크가 54개나 되고 기습의 이점이 사라진 상황에서 이를 모두 파괴하는 건 불가능했다. 애시당초 공습의 목표는 전함과 항공모함, 그리고 진주만의 항공세력이였다. 항공모함의 경우는 의도한 것은 아니었고 오히려 진주만 공습의 최우선 목표물 중 하나에 그들이 있었다. 그저 작전 당일까지도 그 위치를 파악하지 못했고 마침 당일에 모두 운 좋게 진주만에 없었을 뿐이다. 또한 진주만 공습은 어디까지나 일본 함재기들의 안정성과 조종편의성을 희생하여 얻은 항속거리로 초장거리에서 해온 공격이기 때문에 공습 능력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미군처럼 대규모로 [[B-29]]같은 쑥재배기를 날린 게 아니기 때문이다.] 공격하기로 한 일자가 하필 주말이라 상당수의 인원들이 외박 중이었어서 기지의 방어태세도 낮은 편이었지만 동시에 수병 전력의 인명피해가 기습적 공격에 비해 적었다는 점 때문에 미 해군은 우월한 본토의 공업력으로 배만 찍어내면 바로바로 전력을 복구할 수 있었던 점 등이 있다. 그로 인해 일본 해군은 공습 4개월 뒤 곧장 수도인 도쿄를 비롯한 주요 도시에 미군의 [[둘리틀 특공대|보복공습]]이 떨어지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다.[* 해당 공습을 당한 뒤 일본 해군은 미 해군을 태평양 멀리 밀어내기 위해 [[미드웨이 해전]]을 감행해야만 했다.] 넷째로 장기전과 대영 요인에 대한 고려가 결여되었다는 점이다. 실제로 일본 군령부는 미국을 압박하기 위해선 단순히 군사자산만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취약점에 대한 적극적인 공세로 식민지 및 동맹 네트워크를 지속적으로 차단할 필요가 있었다고 보았지만, 연합함대는 이와는 반대로 격전지에 대한 공세를 강화해야 한다는 잘못된 시각을 오랫동안 견지하여 주력함과 해군항공대를 무의미하게 소모하여 1944년의 대공세를 용인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또한 삼국동맹에 근거하여 행동하는 이상 영국의 향방은 곧 일본의 협상에도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하므로 진주만 공습과 남방작전으로 약체화된 ABCD 함대를 격파한 뒤 재빨리 인도양과 남태평양에 공세를 가해 [[ANZAC]]와 [[인도 제국]]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미-영 측의 전략적인 소모를 강요할 필요가 있었다. 일례로 당시 일본 해군 잠수함대 소속으로 남방작전에 참가한 함장 중 일부가 상부에서 명령만 내렸다면 얼마든지 남태평양 보급선단을 격멸할 수 있었다고 증언할 만큼 인식의 부족 탓에 주어진 기회를 이용하지도 못하였다. 진주만 공습은 당시 일본 해군 작전참모부가 낸 최선의 전략으로 당장은 큰 전략, 전술적 이득을 가져다 주고 시간도 벌어주었다. 그러나 미국의 정치적인 의지와 국가의 역량를 지나치게 얕보았고 거듭되는 자만에 빠져 그 시간조차 유용하게 쓰지 못한 채 오판을 반복했기에 미국이 공습의 피해를 수습하고 전력을 회복하자마자 파멸하게 된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